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사후세계에도 나(자아)가 존재하나?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사후세계에도 나(자아)가 존재하나?

하늘에서의 생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절들을 토대로 추이해내야만이 하늘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절들을 기본으로 하늘의 생활들을 구성할 요소들을 함께 살펴봅시다.

실제적인 장소인 하늘과 새 예루살렘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우리가 거할 곳인 하늘을 “처소(place;장소)”라고 부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뉴욕은 한 장소 입니다. 하늘도 뉴욕처럼 실제적인 장소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한 장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장소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늘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곳은 실제적이며 가장 흥미로운 곳입니다. 앞으로 있을 영광스러운 신세계의 수도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과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 건설 중에 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고 계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위하여 마련하고 계신 성은 어떻게 생긴 성이며, 언제 그 준비가 끝날까라는 의문이 생기지요? 요한 계시록 21장 2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별들의 세계 저 건너 편에 있는 낙원에서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저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그 눈부시게 빛나는 성이 바로 이 지구 위에 내려와 의인들의 영원한 거처로 사용될 것입니다.

1. 새 예루살렘 성의 크기
그러면 그 성의 크기가 어느 정도 일까요? 요한 계시록 21장 16절을 보면,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둘레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이천 스타디온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성의 크기를 환산해보면, 그 크기는 미국의 5개주 즉, 버지니아, 콜럼비아, 펜실베니아, 뉴저지, 로드 아일랜드를 합친 정도의 크기가 될 것입니다. 그 성은 완전히 정사각형인데, 둘레가 12,000스타디온 (1500마일 혹은 약 3000Km)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성의 한 면이 375마일(약 750Km) 정도 되는 것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거대한 성벽 안에 뉴욕만한 도시가 450개 정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하늘 예루살렘 성의 모습
성경 요한 계시록 21장을 읽어보면, 예루살렘 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광경은 사람의 상상으로도 그려보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아릅답고 휘황찬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그 성은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다고 되어 있으며, 또한 그 성의 열두개의 기초석들은 각각 다른 보석들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이상 가운데에서 그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너무 휘황찬란하여 그 영광에 그만 정신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그가 이상 중에 빛나는 성벽에 가까이 다가가서 열두개의 각기 다른 색깔의 보석으로 된 기초석들을 보았는데, 그 빛나는 보석들마다 이름이 하나씩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이 그 기초석 중의 하나에 기록된 것을 보는 순간 어떤 감격을 맛보았었을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성의 거리는 유리처럼 맑게 빛나는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그 큰 문들은 하나의 커다란 진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영광의 빛이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신 처소는... 하늘의 아름다움과 영광은 감히 사람의 눈으로 상상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늘에서의 성도들의 생활


1. 살과 뼈가 있는 몸을 가짐
하늘의 아름다움과 영광은 인간의 언어로 불가능하지만, 하늘은 매우 실제적인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환상적이 아닌 실제적인 몸을 가지게 될 것이며, 실제로 여러가지 활동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겠지만, 우리는 살과 뼈가 있는 실제의 몸으로 하늘에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성경절을 2개만 찾아 보아도 그 문제는 분명히 이해가 갈 것입니다. 빌립보 3장 21절에는,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변화될 것을 아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우리는 부활하신 후의 예수님의 몸과 같은 몸을 가질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 몸의 어떠함을 모두 설명하셨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후, 그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고 하셨습니다.


부활 후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께서 살과 뼈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과 함께 잡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셨던 그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내세에서의 우리 본성에 관한 많은 의문들을 풀어줍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가지셨던 몸과 똑같은 상태의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서로 알게 될 것임
우리는 가끔씩 하늘에서의 생활을 상상해 보며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서로 알게 될까?” 많은 사람들은, 하늘은 매우 비인격적인 곳이라는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반대로 말합니다. 비록 예전의 고통들과 슬픔들이 생각으로부터 지워지긴 하지만, 우리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몰라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숫자나 기호를 통하여 서로를 알아보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여기서 지금 서로를 인식하는 것보다도 하늘에서는 더 잘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기서 서로 아는 것보다 그곳에 갔을 때에 서로를 더 잘 알게 될 것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사물들을 매우 희미하게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자주 오해합니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알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마 8: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우리가 구약의 그 영웅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영원한 연합뿐만 아니라,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영감의 말씀을 들려주었던 영적인 거성들과도 친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회, 귀향 등을 좋아합니다. 수십년 후에 옛 친구를 만나서 옛 정을 새롭게 하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만약 다른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다면 하늘은 그렇게 즐거운 곳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고 그리워 하던 사람들을, 또 영적으로 함께 통하는 늘 함께 살고 싶어하던 사람들과, 우리가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들을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만나게 될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생활에서 생활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신앙의 감동을 전달한 끝없는 영향력의 순환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성안의 저택과 시골 전원의 땅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고 계신 집에 대해서 우리는 만족하게 될까요?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여러분을 위하여!”... 지금이라도 원하시기만 한다면 그 집의 문패에 여러분의 이름을 붙이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한 집을 마련하러 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비하신 집을 매우 좋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시는 건축가이시니까요.


우리가 하늘에 가면, 주님께서는 거룩한 성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황금거리로 안내하셔서, 예루살렘 성의 흥미있는 여러 곳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곳에 오랫동안 죄의 세상에서 방황하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로소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생명 강가를 걸을 때, 우리의 인생에 역사하신, 그렇게도 이해할 수 없었던 삶의 신비들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생명나무 강 위로 뻗어져 있어서 달마다 다른 과실을 맺는 생명나무들을 하나 하나씩 우리에게 구경시켜 주실 것이며, 그러는 중에 우리는 한 맨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드는 것을 느낄 것이며, 생각하기를, “어쩌면! 이것은 내가 항상 원하던 바로 그런 집이구나! 저런 저택을 하나 가졌으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이 저택은 바로 너의 집이다. 이집은 너를 위해서 특별히 지은 것이란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집들은 아주 훌륭한 집들로서, 은빛으로 빛이 나며 매우 찬란하게 보이는 진주로 아로새긴 기둥들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성도들이 자기의 찬란한 면류관을 벗어서 둘 수 있는 금으로 된 진열장들도 있겠지요. 그런 빛나고 아름다운 집에서 성도들이 살게 될 것입니다.


죄와 저주의 흔적이 없는 하늘나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풍경으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햇빛이 쓸데 없을 정도의 영광스러운 빛이 우리들의 머리 주위에 늘 비칠 것이며, 성도들은 끊임없이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온갖 꽃으로 가득 차 있는 끝없는 들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들꽃들을 꺾으면서 “이 꽃들은 영원히 시들지 않으리라!”라고 외칠 것입니다. 또한 키가 큰 풀로 덮인 들판도 있을 것입니다. 그 풀의 빛깔은 생동감 넘치는 녹색으로 왕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흔들릴 때마다 은빛과 금빛을 반사하여 우리의 탄성을 자아낼 것입니다. 또 우리는 온갖 짐승들로 가득 찬 들판도 볼 것입니다. 거기서는 사자와 어린양과 표범과 이리가 모두 다 완전한 화합을 이루어 평화로이 우리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숲속은 이 세상에 있는 침침한 숲과는 전혀 다를 것인데, 그 숲 속에는 온통 영광의 빛으로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찬란한 빛을 반사하며 이리 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보며, 우리는 “광야에서도 안전하게 살 수 있고 숲속에서도 편히 잠잘 수 있으리!”라고 외칠 것입니다.

4. 질병도 죽음도 없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하늘에는 질병이나 고통, 죽음 등이 없다. 그 곳에는 실망도 없고, 슬픔도 없고, 죄도 없고, 병들었다고 말할 사람도 없다. 그 곳에는 장례 행렬도 없고, 탄식도 없고, 이별도 없고, 마음 상하는 일도 없다. 단지 예수께서 거기 계시며, 평화가 거기 있다. 그 곳에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이사야 49장 10절).

5. 성도들의 할 일
A. 노동, 성장, 연구 :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사 65:21,22).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늘은 영원토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팔짱만 끼고 편히 살기 때문에 지루한 곳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그곳에서 농사도 짓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아름다운 정원들을 가꾸고 집도 지으면서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에서 하는 일은 지상에서 하는 일처럼 고되거나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은 새로 지은 땅에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행복을 주었던 그런 유쾌한 일에 종사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의 생활과 같은 생애를 살 것입니다.


우리의 체력과 지능이 계발될 것이며, 모든 재능들이 증진될 것입니다. 가장 고상한 희망과 가장 높은 포부도 실현될 것이지만, 거기에는 아직 올라가야 할 새로운 고지, 감복할만한 새로운 기적, 이해하여야 할 새로운 진리, 몸과 마음과 정신의 모든 힘이 요구되는 새로운 연구 재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의 성품이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변화되었다 해도 아직 더 장성한 분량의 성품,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성도들은 더 무한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나고 성장을 거듭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장은 영적인 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계속될 것인데, 왜냐하면 처음 아담과 하와가 창조받았을 때보다 죄의 결과로 인해 사람들이 퇴보되었기 때문에 그러할 것입니다. 아마 만국을 소생시키기 위해 있는 생명과 과일은 성도들을 소성하게 하고 더 성장하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속의 과학을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구속의 과학은 모든 과학 중의 과학이며, 천사들과 타락하지 않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연구하기를 원하는 과학입니다. 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과학은 영원한 세월을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의 노래가 될 것이며,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비밀은 우리가 두고 두고 연구해야 할 주제가 될 것입니다. 그 외에 또 우리는 창조의 신비와 과학도 배울 것입니다.

B. 천년 동안의 심판과 왕 노릇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계 20:4,6).


특별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천년동안 구원받은 성도들이 할 중요한 과제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악인들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심판석에 앉아 기록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할 것입니다. 그들 앞에는 생명책과 사망의 책이 펴 놓입니다. 생명책에는 성도들의 선한 행실들이 기록되어 있고 사망의 책에는 악한 자들의 나쁜 행실들이 적혀 있습니다(단 7:10 참조).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심판의 자리에 앉아서 악인들에게 심판을 집행하게 될 때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그들의 행위에 따라 결정하고 그것들을 그들의 이름 곁에 나란히 써 놓을 것입니다. 그 일은 성도들이 그 도성에서 천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할 일입니다. 그 때에 성도들은 왜 그 사람이 하늘에 올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그리며


천년이란 세월은 영원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과 기쁨 속에서 성도들은 천년을 그렇게 지낼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거민들을 만나기 위해 무한히 크고 넓은 우주와 다른 별 세계들을 여행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거나 쓸쓸함을 느끼거든 이 암담한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 하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애정을 하늘의 즐거움에 두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이 세상에 있는 시련과 실망을 그렇게 심하게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영광스러운 본향과 면류관과 거문고와 사랑스러운 구주께서 거기에 계심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그곳에 넉넉히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므로 모든 것을 희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체험한 지옥(2008. 2. 3 주일 설교 원고)


<서론>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지옥과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날 지옥과 천국 이야기를 하면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은 앙천대소하면서 무식하고 원시인 같은 소리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인간 지식과 과학이 이처럼 발달한 시대에 웬 호랑이 담배 먹던 이야기를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쉽게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더러 왜 듣지 못하냐, 귀더러 왜 보지 못하느냐고 꾸짖으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은 듣기 위해서 만들어 지지 않고 귀는 보기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간 지식과 과학은 이 세상 물질이고 정신적인 세계 밖에는 알 수 있는 기능이 없습니다. 신령한 세계는 오직 영적으로만 알게 되고 영적인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옥과 천국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과학자의 연구실에서나 지식자의 강단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어느 날 설교를 하면서 "만약 내가 여러분에게 단 5초만 지옥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조나단 에드워드는 직접 지옥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존 웨슬레도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지옥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처사를 볼 때마다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본론>

1. 부자와 나사로의 이생의 삶과 후생의 삶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생의 삶과 후생의 삶은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 즉, 권력자가 입는 옷을 입고 또 가는 베옷 굉장히 부자들만 입는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냈습니다. 왜냐하면 권력 있지요, 돈 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서 하나님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쾌락 중심으로 주지육림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라고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었습니다. 남루하고 온 몸에 병들은 거지가 기동을 잘못하면서 대문 앞에 누워서 밥상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개에게 줄때 가서 같이 주워 먹고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개들하고 친구가 되어서 개들을 끌어안고 자고 개들과 더불어 살았었습니다. 개들이 그의 위로가 되었었습니다. 그 헌데를 핥아주고 비벼준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늘 그렇게만 있는가요? 거지가 마음이 비고 몸이 아프니까 자연히 찾을 것은 하나님과 선지자의 말씀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때는 구약시대를 예를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전의 이야기니까. 그래서 구약시대 성도들이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알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을 따르고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전에는 신세가 괴로우니까 하나님을 찾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귀를 기울이고 힘써서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만 이 부자는 호화생활에 권력생활을 하니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고 모세의 율법이나 선지자의 글은 뒷전으로 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거지가 죽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하늘 천사들이 거지를 받들어서 낙원으로 갔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 낙원은 지옥과 구렁텅이 하나 사이에 있어서 구약성도들이 가서 기다리는 대합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와서 "내가 너를 위해서 다 완성했다. 나를 기대하고 믿은 너희들은 이제 나와 천국으로 가자"고 이 낙원을 천국으로 옮길 때까지는 지옥과 한 구렁텅이 사이에 낙원이 있어서 구약성도들은 낙원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기다렸었습니다. 이 거지 나사로도 낙원에 들어가서 부자와 함께 간 것이 아니라 자기는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또 죽었습니다. 굉장히 큰 상여를 만들고 상장을 휘날리고 아름다운 묘지를 단속했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가 묘지 속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음부에 떨어져서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 하다가 보니까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고함을 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어서 냉수 한 방울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얼마나 괴로웠든지 냉수 한 방울입니다. 한주먹도 아닌 것입니다. 한 움큼도 아니에요. 그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너는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나사로는 거지로 고통하면서 살면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존경하고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나사로는 여기 와서 위로를 받고 너는 지금 고통을 받는다." 그러니까 이 부자가 말했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 세상에는 제 형제 다섯이 있는데 제발 나사로를 보내어서 형제에게 미리 말해서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이나 선지자의 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도 그 말 듣지 않는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부활하면 우리 형제들이 이것을 듣고 이곳에 안 올 것입니다." 단호하게 아브라함은 거부하고 만 것입니다. 구약에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야훼를 섬기고 율법에 귀를 기울이고 선지자의 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천국 대합실인 낙원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거역한 사람은 지옥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사흘 동안 이 낙원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었는데 이제 내가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너희 죄를 다 대속하고 구원했으니 올라가자!" 낙원을 데리고 천국으로 갔습니다. 이제 낙원은 천국 한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기 전에 죄인들이 기다리는 대합실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2. 지옥은 어떤 곳인가?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태어날 세상 이야기를 해도 이해할 수 없듯이 다가올 영적 저 세상의 일을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성경에는 온갖 이 세상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가 10가지 있는데 성경에서 지옥을 묘사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시편에서는 '고통만 있는 곳', 전도서에서는 '일과 계획이 없는 곳' '지식과 지혜도 없는 곳', 아가서에서는 '잔혹한 곳', 이사야에는 '벌레로 뒤덮인 곳', 마태복음에는 '꺼지지 않는 불 못'으로 마가복음에는 '벌레도 죽지 않는 곳'으로, '불로서 소금 치듯 하는 곳'으로, 누가복음에서는 '기갈 당하는 곳'으로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영원한 멸망의 곳'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몸 안 인지 몸 밖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지옥은 마치 우주의 블랙홀 같았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별들을 다 빨아 당겨서 삼켜 버리는 지옥인데 엄청난 자석과 같았습니다. 사실은 쇠붙이가 있으면 다 끌어당기는데 별 수 없이 끌려가는 것처럼 지옥은 죄만 있으면 다 끌어 당겨요. 손톱만한 죄로부터 바위 덩어리 만한 죄, 모든 죄를 끌어 들이는 엄청난 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옥으로 사람들이 끌려 들어가는데 막 뒹굴면서 엄청난 인력에 곤두박질치면서 빨려 들어가는데 누구도 막을 수가 없어요. 죄는 큰 죄나 작은 죄나 죄는 쇠붙이가 크거나 적거나 자석에 끌려가듯이 열린 지옥에 끌려 들어가는데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지옥은 사망의 처소인데 캄캄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데 저도 회오리바람 같은 그 자석의 힘에 의해서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지옥문에서 들어가자마자 그곳은 시간이 중지된 곳이었습니다. 영원한 곳이었습니다. 영원한 곳에 급속한 속도로 떨어지는데 그 고통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말로써 비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도저히 말로다 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고 못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거기에 떨어져서 고통을 당할 때 생각하기를 '안 태어난 것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고통의 괴로운 세계에 올 바에는 안 태어나는게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데 마음속에서 '예수님의 보혈을 부르짖으라. 예수님의 보혈을 부르짖으라.' 저는 원래 예수를 믿고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니까 보혈이 마음속에 있지만 다른 사람은 보혈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보혈로.. 아주 모기 소리 만하게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보혈로 하니까 끌려 내려가던 내가 딱 중지를 해요.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을 외치니까 지옥이 끌어당기는 자력선이 없어져 버리고 떠올라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함을 쳤습니다. 예수님이 보혈로 예수님이 보혈로 예수님의 보혈로 그러니까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말할 때 마다 떠올라 오고 떠올라 와서 지옥의 세력이 끊어지고 나중에 세상으로 탁 나와서 정신을 착 차렸는데 영원의 세계를 여행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습니다.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그러한 느낌을 느껴서 제가 수첩을 내어서 간증을 적었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절대 단절의 처소인 것입니다. 지옥에는 하나님 생각도 할 수 없어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생각도 할 수 없고 마음에 보혈이 없는 사람은 교회 아무리 왔다 갔다 하고 형식을 지켜도 소용이 없어요. 지옥은 눈꼽만치 죄만 있어도 끌려 들어갑니다. 우리 눈꼽만큼 죄도 없이 다 정결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 예수님이 보혈 공로로 말미암아 죄가 하나도 없이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그런 희고 의로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지옥에서 떠올라 오는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밖에 없는 것입니다. 흑암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보혈이 능력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혈을 모르는 사람은 거기에 내려가서 영원히 올라올 수 없습니다. 단절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 세상에 대한 것 완전히 단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대화도 헛된 것입니다. 공허함 밖에 없습니다. 이웃이 다 그 고통 속에 있는데 대화가 됩니까? 다 곤두박질 치면서 몸부림치는데 대화가 됩니까? 지옥에 여러분 불이 나는 바깥에서 타는 줄 알았는데 밖에서 타는 것이 아니에요. 유황불이 속에서 타올라 오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유황불이 타올라 오르고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온갖 고통이 다 다가오는데 세상으로 유황불이 다 무슨 구더기다 무슨 고통이다.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해요. 표현 못해요. 인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괴로움은 도저히 인간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속에서 끌어 오르니까 자기 고통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누구 이웃하고 대화를 한단 말인 것입니까? 엄청난 고통 속에 짓눌려 이웃과의 대화가 끊어진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6절에 보면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절대로 지옥의 밖에 나갈 수가 없는 강력한 죄악의 자력에 끌려서 지옥에 포로가 되기 때문에 바깥세상하고 대화가 절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은 완전 절망의 처소였었습니다. 시간이 정지 되어 버렸어요. 시간이 있어야 내일의 희망도 현재의 희망도 있는데 시간이 정지되어 버리니까 내일에 희망도 현재의 희망도 전혀 없는 영원한 절망만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1년이 지나갔다. 2년이 지나갔다. 그것이 없어요. 지옥문에 들어가자마자 시간 개념은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겠지요? 적막강산입니다. 단절의 세계인 것입니다. 절망의 처소인 것입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꼽 만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괴로워서 이것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언제쯤 이 괴로움에서 놓여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습니다. 오직 좌절과 절망만 꽉 들어찬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3절로 24절에 보면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 하나이다"

그 불꽃이 그 속에서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괴로우니까 물 한 방울이라도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외친 것입니다. 물 한 방울이 얼마나 귀합니까? 엄청나게 속에서 불이 타오르는데 영혼의 기갈이 말로다 할 수 없는데 물 한 방울만 있어도 사는데 물 한 방울이 거절되고 만 것입니다. 지옥은 완전한 절망의 처소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혐오스럽고 저주스러워 자살하려고 하나 죽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내 자신이 밉든지 내가 나를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칼이 있으면 찔러서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저주스럽고 혐오스러워도 지옥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을 수가 있으면 큰 축복이지요. 죽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자기가 자살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에 대한 미움이 하늘에 사무치니까 살수가 있어요? 이 세상에도 자기를 비하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하는 것처럼 지옥에는 자살을 할 수 없으니까 괴롭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9장 48절로 49절에 예수님께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 말이 난 무엇인지 몰랐는데 죽는 것이 없어요. 구더기 같은 죄악의 죄책이 꺼지지도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도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고함치고 몸부림치며 소금 치듯합니다. 몸부림칩니다. 저도 막 몸을 비틀고 그냥 앞으로 엎드렸다가 뒤로 누웠다가 옆으로 기었다가 자빠졌다가 온갖 짓을 다 해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지옥에서 회개나 후회나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회개하려고 해도 회개할 수 없고 후회하려고 해도 후회할 수 없어요. 시간이 중지된 곳이라 과거의 일을 회개할 수도 없고 후회할 수도 없어요. 세상에서는 우리가 회개할 수 있고 후회할 수 있지 않습니까? 회개도 못하고 후회도 못하므로 자기의 상황이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할 사람은 이 땅에 있을 때 회개해야 돼요. 지옥에 들어가면 회개할 줄 알아도 회개가 없고 후회가 없어요.

히브리서 6장 6절에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지옥에 들어가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롭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그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데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은 조금 지옥의 가장 맨 밑바닥에서 떠있고 그 죄의 중량에 따라서 흡입력이 달라요. 큰 죄는 강한 흡입력으로 끌려 들어가고 적은 죄는 좀 더 중간에 있지만 고통은 다 똑같아요.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버림받은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여러분 절망, 나는 버림 받았다. 그것이 영원 속에 꽉 들어찼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 받고 세상에서 버림받고 이웃에게 버림받고 전혀 내 자신에게도 버림받고 보통은 아무리 버림 받아도 자기가 자신을 버리지 않지 않는가. 자기 자신은 자꾸 보호하고 변명하는데 그것도 없어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버림받아 전적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몹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27절로 28절에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을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버림받은 그의 기도를 들어줬습니까? 단호하게 "No"했습니다. 버림받은 처소인데요. 기도가 무엇이며 응답이 무엇입니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로 9절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영원한 형벌의 멸망이라니까 하루 이틀의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 왜냐면 시간이 없는 것 지옥은 시간이 중지된 곳이니까 그 고통은 하루 이틀의 고통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인 것입니다.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 고통 자체 속에 존재하는 삶이란 엄청난 것입니다. 희망이 있어야죠. 좀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 좀 나아질 것이다. 좀 지나면 변화가 올 것이다.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 극한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절망과 그 좌절과 그 버림받은 심령과 그 괴로움은 도저히 말로써 표현 못합니다. 저는 그 때 느낀 것은 뭐냐면 정말 지옥 갈 바에야 안 태어난 것이 좋다. 지옥에 가서 자살이라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은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데 살아 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미꾸라지에 소금 치듯이 몸부림을 치고 발버둥을 치는데 그것이 한 두 시간 하는게 아니라 영원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자지도 아니하고 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지옥 불에 타면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태양이 항상 공중에 떠있어 수억만년 동안 저렇게 불빛을 내는 것처럼 억만년 동안 시간 없이 속에 죄가 불타는 것입니다. 왜, 죄를 씻을 보혈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죄는 영원히 타는 원자핵과 같아서 끌 수가 없습니다. 죄는 이 세상에 예수님 보혈로 끌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혈이 없는 곳에 죄를 끌 수가 없으니까 영원히 불타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자체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정말 몸서리치는 곳이 지옥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첫째 육체가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지옥에 떨어진 것은 둘째 사망으로써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희랍 신화에 지옥에서 고생하는 인물 중에 탄탈로스와 시지프스가 제일 유명합니다. 왕이었던 탄탈로스는 지옥에서 목까지 잠기는 물속에 서 있는데 바로 코 밑에 먹음직한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탄탈로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목을 굽히면 물은 순식간에 땅 밑으로 쫙 빨려 들어가고, 과일을 따먹으려고 손을 뻗치면 나뭇가지는 바람에 날려 휙 하늘로 올라가고 탄탈로스는 바로 코 앞에 물과 맛있는 열매가 있지만 영원히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려야만 한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소원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소원이 눈꼽만치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리고 시지프스는 알베르 까뮈가 소설에도 묘사했는데, 고린도의 왕으로 불의와 부조리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이제 지옥에서 시지프스는 가파른 비탈길 저 아래에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는데 있는 힘을 다해 꼭대기까지 겨우 밀고 올라가면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다시 온 힘을 다해서 이 바위를 밀어 올리면 정상을 코앞에 두고 바위는 또 밑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시지프스는 영원히 이 일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말하면 영원한 고통인 것입니다. 벌써 성경이 오기 전에 희랍 신화에서도 지옥을 묘사할 때 이런 고통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탄탈로스와 시지프스가 당하는 고통과 같이 영원히 고통 그 자체 속에 존재하는 삶으로 몸서리 처지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저는 일생을 목회하면서 지옥에 대한 설교를 별로 안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지옥도 있을 만 하구나. 그런 생각이 많이 났어요. 뭐 불타면 좀 피하면 안 되겠나. 벌레가 우글거리면 벌레를 좀 피하면 되겠지.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 했는데 제가 순식간에 지옥으로 떨어져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은 말로써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깨어나자마자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에 가지 마라고 경고해야 되겠다. 불타는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죄를 지을 때는 이 세상에 일종의 환락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나중에 엄청난 지옥으로 끌려가는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보니까 큰 죄도 끌려 들어가고 조그마한 티끌 같은 죄도 결국에는 그 자력선에 지옥의 흡입력에 끌려 들어가요. 지옥은 죄를 끌어 들이는 자력선이에요. 그러므로 나 요만큼 죄 지어도 괜찮겠지? 천만에요. 오직 죄를 희게 씻어 버리고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혈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상태, 그리고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상태가 의의 상태인 것입니다. 이 의는 인간의 노력도 안 되고 공부로써 안 되고 수양과 도덕으로도 안 되고 고행으로도 안 되고 무엇으로도 인간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해서 벌거벗고 부끄러웠을 때 인간의 힘으로 무화과 나뭇잎을 가지고 치마를 입었지만 해가 나니 또 말라 버리고 또 앞치마를 해 입었더니 해가 나와서 말라 버리고 아무리 나뭇잎으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해 입어도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반 영구적인 옷을 입혔습니다. 그래서 부끄럼 없이 하나님 앞에 서고 에덴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만든 나무 잎사귀로써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수양과 도덕, 고행, 종교를 가지고는 죄악이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야 되는데 오늘날 그 짐승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잡았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그 가죽을 벗겼습니다. 그 옷을 공짜로 입혀 주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입혀 주시니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고 지옥이 세력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옥에 안 갈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엄청난 자력선으로 잡아당기는데 자력은 여러분, 나무나 동은 끌어당기지 못합니다. 철만 끌어당기지요. 지옥은 죄만 끌어당기지 용서받은 의인은 당길 힘이 없어요. 자력선이 힘이 없어요. 예수의 보혈을 부르짖을 때 모든 지옥의 세력이 끝나므로 지옥에서 떠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이외에는 우리를 희게 하고 의롭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